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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erse] 입에 달린 욕망 (글 손시내 | 사진 이영진)

원문

http://reversemedia.co.kr/article/554

 

입에 달린 욕망 - BIFF 2021 <컨버세이션> 김덕중

말은 어떻게 대화가 되며, 관계는 어떤 힘으로 지탱되는가. <컨버세이션>은 제목이 일러주듯 다양한 대화로 채워진 영화다. 영화는 매번 다른 상황에 놓인 인물들을 비추며 사소한 대화에 귀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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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컨버세이션>은 제목이 일러주듯 다양한 대화로 채워진 영화다. 한편에는 은영(조은지)을 중심으로 하는 여자 친구들이, 다른 한편에는 승진(박종환)을 둘러싼 남자 무리가 있다. 영화는 매번 다른 상황에 놓인 인물들을 비추며 사소한 대화에 귀 기울인다. 이들은 지나간 시절을 추억하고, 다가오는 삶의 고민을 나누며, 또한 금세 사라져갈 별것 없는 이야기를 나눈다. 후회와 미련, 기대와 희망이 일상의 수다 속에서 일렁인다. 각각의 장면들은 명확한 인과관계로 엮이지 않고, 시간 축도 고정돼있지 않다. 덕분에 우리는 오가는 말과 인물 사이의 관계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 말은 어떻게 대화가 되며, 관계는 어떤 힘으로 지탱되는가. <컨버세이션>은 그 물음에 느긋하게 답해보려 한다. 첫 장편인 <에듀케이션>(2019)으로 관계의 지속과 균열을 탐구했던 김덕중 감독의 신작으로, 10월6일 개막하는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비전 부문에서 첫선을 보인다.

 

 

졸업 작품인 <에듀케이션> 이후 두 번째 장편이다.

졸업 이후에는 생계가 먼저라 일을 계속했다. 한편으론 <에듀케이션>이 세상에 공개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면서 다시 힘을 내 시나리오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엉망이긴 하지만 초고는 내가 나름 빨리 쓰는 편이다. (웃음) 규모가 큰 영화, 장르 영화 등 2~3편 정도를 썼는데, 여건과 타이밍이 맞아떨어지고 본격적으로 제작이 시작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꽤 오래 걸리겠더라. 막막했다. 그럼 기다리는 시간에는 영화를 못 만드는 건가, 뭐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컨버세이션> 시나리오를 그냥 써버렸다. 물론 완전히 백지에서 시작한 건 아니고, 평소에 메모해둔 것들을 하나씩 꺼내왔다. 스타일이나 내용에 대한 고려보다는 일단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우선이었다.

 

규모는 어느 정도로 예상했나.

아무런 지원이 없어도 혼자 제작할 수 있는 정도로 규모를 정했다. 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제약을 먼저 두고서 거기 맞게 스태프를 구성하고 시나리오를 썼다. 정해진 규모 안에서 내가 할 수 있고 좋아하는 게 뭔지 생각해보니 ‘대화’더라. 그 주제로 단편을 만들어보자고 했던 게 조금씩 확장돼서 장편이 됐다. 섹션 1인 여성 셋의 수다가 시작이었고, 거기 남성 셋의 이야기를 붙이면서 섹션 2가, 1과 2에서 각각 한 명씩 꺼내 만나게 하면서 섹션 3이 만들어졌다. 처음엔 연작 형식으로 단편을 하나씩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성격이 급해서 몰아 찍게 됐다. (웃음)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얼마나 오래 찍었나.

2020년 11월에 첫 촬영을 했고, 올해 6월에 마지막 촬영을 했다. 대개 한 달에 한 번씩, 한 장면씩 찍었다. 기다리는 시간에는 촬영 준비를 하며 시나리오를 다듬었다.

 

보통의 내러티브 영화나 전작인 <에듀케이션>과 비교해보면, <컨버세이션>은 상황에 관한 구체적 묘사와 설명이 최소화돼있고, 각 장면이 시간순으로 배열돼있지도 않다. 개별 장면은 독립적이며, 섬세하고 풍성한 리듬으로 채워져 있다. 이런 구성을 택한 이유가 있을까.

대화 자체에 집중하고 싶었다. <에듀케이션>에서 하지 못했던 걸 풀어보고 싶다는 마음과도 관련된다. 전작에선 인물들이 서로 회피하는 상황도 많고 대화가 거의 성립되지 않잖나. 이번에는 생생한 대화가 많길 바랐다. 다양한 인물을 많이 등장시켜서 그들의 생동감으로 영화가 밝아지길 바라기도 했고. <에듀케이션>을 만들 때는 하고 싶은 말을 하려는 욕심,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는 야심이 있었다면, 이번엔 거기서 벗어나 가볍게 가고 싶었다. 막상 제작이 돌아가니 쏟아지는 에너지가 있어서 욕심이 생기긴 했지만. (웃음)

<컨버세이션>
<컨버세이션>

어떤 욕심을 부렸나. (웃음)

처음엔 그냥 카페 옆자리 대화를 킬킬대며 엿듣는 재미로 영화가 가득 차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제작에 들어가니 전체가 장편의 리듬으로 모이기보다는 제각기 흩어져 버릴까 봐 걱정스러웠다. 나중에 다 만들고 나서 보니, 나도 모르게 퍼즐 맞추기를 할 수 있도록 조금씩 알레고리를 만들고 떡밥 같은 걸 넣어놨더라. (웃음) 좋은 선택이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영화의 중심은 대화고, 자연스럽게 관계의 다양한 형태를 담아내게 됐다. ‘대화’에서 무엇을 보는가.

대화를 지켜보는 게 일단 재밌다. 대화만으로도 사람의 성격이 드러나고, 상황 자체가 파악되지 않나. 실은 모든 대화가 수평적인 게 아니고, 우리가 모두 성립되는 대화를 하지도 않는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어도 서로의 속마음과 진짜 생각을 알지 못해서 그럴 텐데, 당사자는 답답하겠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선 그게 너무 묘하고 흥미롭다.

 

대화할 땐 주로 듣는 쪽인가.

내향적이라 말을 많이 하진 않는다. 하지만 속에는 욕망이 있지. (웃음) 모든 이가 말을 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고, 분위기를 고려하며 그걸 다 누르고 있는 거 아닐까. 말하고 싶은 욕망끼리 서로 싸우는 게 참 치열하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걸 보고 싶어서 만든 장면들도 있고.

 

영화엔 가볍게 흘러가는 수다 장면이 많지만, 얘기한 대로 대화의 어려움, 혹은 실패라고 할 만한 장면도 적지 않다. 대화의 어떤 측면들을 드러내고 싶었나.

처음에 대화를 가지고 영화를 구성하고자 했을 때 의도했던 건 섹션 1에 거의 다 들어있다. 말하고 싶은 욕망이 서로 싸우고, 본인이 본인 말에 취해서 다른 말엔 관심도 없는데, 파리 유학 시절을 회상하며 불어를 쓰자는 규칙을 두니까 이들 사이에서 드디어 대화가 성립된다. 그런 아이러니를 그려보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그게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알레고리인데, 이후에 그대로 반복할 수 없으니 섹션 2에선 승진과 필재(곽민규)의 관계에 서사를 만들고, 섹션 3에선 그 영향 아래서 전체를 다듬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 안에서 평소 해보고 싶었던 콘셉트의 상황과 대화를 만들어봤다. 실제 정당 이름을 말하며 수다를 떠는 장면도 넣었고, 일종의 게임을 통해 진실과 거짓말의 경계가 드러나는 장면을 찍기도 했다.

<컨버세이션>
<컨버세이션>

특히 기억에 남는 대사나 장면이 있다면.

배우들은 “내가 말도 못 하고 그러면 빡이 쳐.” 하는 대사가 포인트 같다는 말을 많이 해줬다. 그저 우애로운 친구들끼리 만난 자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 대사로 상황을 탁 틀어주니까 괜찮다고들 하더라. 원래 글로 보면 좀 더 의미심장해 보인다. (웃음) 난 택시 안에서 은영이 택시기사와 나누는 대사가 맘에 든다. 그 부분을 쓰면서 그녀가 느끼는 설렘이 탐나고 귀엽다고 생각했다.

 

일상의 모습 속에 쓸쓸함, 외로움, 무기력함 같은 정서가 감돈다. 감독 본인이 가장 가깝게 느끼는 정서인가.

완성하고 많이 보진 않았는데, 몇 번 보면서 ‘아, 내가 다 드러나 버렸네.’라는 생각을 제일 많이 했다. 일상에서 내게 힘을 주는 것들이 물론 많지만, 뭐 하나 결정적인 게 없고, 또 내게 도대체 뭐가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뭘 붙잡고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할까. 그렇게 약간은 허무주의적이고 허공에 뜬 상태로 사는 것 같다. 그런 내 세계관이 영화에 반영돼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물론 나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웃음) 여하튼 세계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내 한계치가 드러난 거로 생각한다. 그래도 그렇게 힘들어하는 인물들이 애쓰면서 서로 어루만져주기도 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은영 역의 조은지 배우와 승진 역의 박종환 배우가 중심을 이루고, 그들의 지인으로 김소이, 곽민규, 송은지, 곽진무 배우가 등장한다. 모두 관계의 역학과 일상의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영화를 알차게 채웠다.

박종환 배우의 경우 다른 작품들도 좋지만 <얼굴들>(이강현, 2017)의 영향이 컸다. 그 영화 또한 비선형적 구조에 다중 인물이 등장한다. 영화의 결이 비슷하다는 느낌이 있어서 종환 배우와 꼭 함께 하고 싶었다. 조은지 배우는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2박 3일>(2016)의 감독으로 만난 것이 인상에 남았고, 이후 <카센타>(하윤재, 2019)를 보고 같이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둘을 포함한 6명의 배우를 이미 시나리오 쓰면서 다 정해뒀고, 다행히도 계획대로 캐스팅이 이루어졌다. 캐스팅하면서, 지금 내가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라며 창작 배경을 먼저 설명했다. (웃음) 다음 영화까지 공백이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하고 싶고, 여러 제약 속에서도 연기와 배우만큼은 욕심을 내고 싶다고. 어쨌든 나 혼자서 여섯 명의 이야기를 썼는데, 그게 한 사람의 목소리로 느껴지지 않길 바랐고, 인물이 배우를 만나 각자의 다른 색과 개성을 입게 된 게 좋다.

 

함께 영화를 공부했고, <에듀케이션>의 촬영 감독이기도 했던 <여름날>(2019)의 오정석 감독이 이번에도 촬영을 맡았다. 어떤 점을 염두에 두며 촬영을 진행했나.

자체제작비로 만드는 영화라서 하고 싶은 건 싹 하고 싶다는 마음에 인물의 동선이며 카메라 위치와 움직임까지 많이 계획해갔다. 정석이한테 그런 것들을 얘기하면 좀 아닌 것 같으니 다시 생각해보라는 피드백을 듣기도 했다. (웃음) 결과적으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 게 많다. 촬영 관련해서는 장면마다 신경 쓴 부분이 달랐다. 아파트 복도에서 담배 피우는 장면이나 원형 산책로는 장소가 먼저 정해진 케이스다. 명확한 원칙이 있던 건 아니지만, 심도가 얕은 화면은 쓰고 싶지 않았다. 롱테이크가 많기 때문에 로케이션을 활용해 동선을 다변화시키면서 재미를 만들고자 했다.

<컨버세이션>
<에듀케이션>

각 인물의 타임라인을 애써 따라가며 영화를 감상하게 되진 않지만, 결국 은영과 승진이라는 서로 다른 세계의 두 사람이 만나는 것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 그런데 끝까지 둘 사이의 긴장은 지속된다.

자연스럽게 그 길로 갔던 것 같다. 다른 선택지를 떠올리기 어렵기도 했고, 그렇다고 옴니버스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둘의 관계가 성립되는 걸 보여주면서, 내적인 고민이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 등 그동안 정리되지 않은 부분을 다듬으려고 했다. 그런데 확실하게 끝을 내고 싶지가 않더라. 연출자가 구성을 핑계로 결론을 내려버리는 느낌도 들었고. 무엇보다 이미 형성된 인물들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마지막 장면은 그 정도가 맞는 것 같다.

 

다음 영화를 기다리는 시간에 부러 기회를 만들어 장편 작업을 또 하나 끝냈다. 어떤 마음인가.

하고 싶은 내용을 가지고, 원하는 방식으로 프로덕션을 꾸려서 영화를 만들었다. 하고 나니 좀 두렵기도 하다. 말했듯이, 내가 너무 많이 드러난 것 같아서. (웃음) 물론 후련하지만, 막막한 마음도 든다. <에듀케이션>은 학교 안에서 나름의 야망을 부려본 결과고, 그때 하지 못했던 것을 이번에 싹 해봤는데, 그렇다면 다음엔 뭘 더 할 수 있나 고민스럽다.

 

써놓은 시나리오는 꽤 있지 않나.

SF 액션 영화도 있고, 대학생 농활을 소재로 한 공포 영화도 있다. (웃음) 엄마가 떠난 후에 친구와 연인을 경유하며 삶의 불안을 해소해보고자 하는 여자 고등학생의 성장 영화도 있고. 지금이라도 영화화 기회만 생긴다면 다 열심히 할 수 있다. 예전에는 허세나 야망이 좀 더 컸던 것 같은데, 이제는 꾸준히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다. 실패작도 만들고 다시 나아지기도 하면서, 그렇게 계속하는 사람.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님이 좀 비슷한 것 같은데. (웃음) 이번엔 너무하셨네, 싶다가도 다음 작품이 너무 궁금한 감독님이다. 나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