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biff.kr/kor/artyboard/mboard.asp?strBoardID=9612_06
가능성의 세계 (이하임)
김덕중 감독의 <컨버세이션>은 영화의 제목에 걸맞게 인물들이 끊임없이 대화한다. 각각의 쇼트에서 카메라는 고정된 채 인물들만을 비추며 마치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는 다양한 범주의 대화를 모두 살펴낸다. 게다가 한 장면에서 이루어진 인물들의 대화는 다음 장면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비선형적으로 흘러가기에 영화의 내러티브를 하나로 의미화하기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하는 걸까.
<컨버세이션>을 두고 하나의 메시지로 무언갈 설명할 순 없지만, 영화가 진득하게 밀어붙이는 점이 있다면 영화의 세계를 확장해간다는 점이다. 먼저 영화의 외화면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다. 영화는 카메라가 보여주는 시점과 외부의 소리를 충돌시키며 프레임 바깥의 공간을 지각하게 한다. 인물들의 대화는 종종 프레임 너머를 포함하지만, 카메라는 이를 보여주는 법이 없다. 예컨대, 버스킹 장면이 그렇다. 인물의 시선과 대화는 버스킹 상황을 향해있지만, 카메라는 두 인물의 신체를 벗어나지 않는다. 전기를 고치는 장면 또한 마찬가지다. 인물들은 프레임 안팎을 이리저리 넘나들지만, 카메라는 고정한 시점 이외 어떤 것도 따라가지 않는다. 물론 고정된 카메라의 시점만으로 영화가 프레임 바깥을 이끌고 온다는 것은 비약처럼 보이고, 되려 인물과 외부를 분리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는 프레임 바깥에 존재하는 노랫소리, 프랑스 사람들의 대화 소리를 비롯해 배경음으로 남아있을 법한 사운드를 영화에 선명히 담아내며 보이지 않는 공간까지 영화에 담아내려는 듯 보인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지점은 프레임 외부뿐만 아니라 화면 속에서도 확장해간다는 점이다. 가령, 승진(박종환)의 공원 산책 장면에서 인물들은 대화하며 걷지만, 카메라는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지켜본다. 사라지는 인물들 덕분에 배경이었던 공원의 풍경은 전경으로 마주하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뜬금없는 인물이 나타나 자전거를 끌며 화면 앞을 가로질러 지나가기도 한다. 이처럼 영화는 그림처럼 남아있었을지 모를 배경에 깊이를 더하며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세계를 넓혀간다.
영화는 고정된 카메라를 통해 인물의 대화로 만드는 하나의 세계를 보여주고, 동시에 지각하지 않던 영화의 세계를 확장해가며 이 영화만의 리듬을 만들어간다. 영화 속 인물들은 하나의 대화에서 서로 다른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소통에 실패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말을 해야 이해하는 쪽으로 가닿을 수 있다는 듯 누군가와 계속해서 대화하기를 시도한다. <컨버세이션>이 보이지 않거나 보지 않았던 세계를 보여주려는 노력은 영화와 대화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넓혀주는 것만 같다.
잘 다듬은 구성의 매무새 (추아영)
영화 <컨버세이션>은 은영(조은지)과 승진(박종환)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이 장면마다 등장해 일상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다양한 소재를 유려한 대화의 리듬을 갖고 풀어낸다. <컨버세이션>은 총 15개의 롱테이크 장면으로 이루어진다. 영화는 굵직하게 장면을 구성하고서도 어색하지 않게 보일 수 있을까?
영화의 각 대화 장면은 대화를 이루는 말과 침묵의 관계를 넌지시 드러낸다. 일상에서 대화를 나눌 때, 우리는 상대를 인식하고 대화의 맥락에 맞는 말을 고른다. 입 밖으로 꺼낼 말과 내뱉지 않아야 할 말을 구분한다. 영화에선 겉으로 드러난 말보다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또 하나의 말 ‘침묵’이 인물의 내적 감정을 더 공고히 드러내기도 한다. 말과 말 사이 침묵은 각각의 대화 장면 안에 내적 긴장감을 형성한다. 가령 두 남자가 공터에 유모차를 이끌며 등장하는 장면에서 한 남자가 친구에게 ‘애수’의 뜻을 묻는다. 상대에게서 돌아온 답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 책을 읽어보라는 지시다. 두 남자는 자연스럽게 문답이 이어지지 않고, 질문에 질문을 반복하며 연신 삐걱거리는 대화를 이어 간다. 여기서 두 남자의 말 사이 침묵은 그들의 대화가 매끄럽지 않게 흐르고 있음을 알게 하며, 인물 감정의 부정적인 뉘앙스를 대신 내비친다. 모든 대화 장면은 일상의 복잡다단한 소재들을 토해내며 연속으로 이어져 영화를 자칫 중구난방으로 보일 수 있게 한다. 이런 영화의 매무새를 다듬기 위해 대화 장면 안 말과 말 사이 침묵을 놓아 두어 영화에 미묘하고도 동일한 호흡을 불어넣는다.
자동차 소리, 오토바이 소리, 기차 소리와 같은 배경음은 영화의 주된 공간인 도시의 분위기를 짙게 배어나게 한다. 또 각 대화 장면 사이에 이질감을 줄여주기도 한다. 한 공간에서 인물의 이동 없이 이루어지는 정적인 대화 장면과 이따금 등장하는 인물의 이동 장면(계단 이동, 택시 이동, 유모차 이동, 숲길 이동)은 적절히 조화되어 영화에 통일감을 준다. 전반적으로 <컨버세이션>은 공간보다 인물이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장면을 구성한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숲길 장면은 인물이 실루엣에 가깝게 보이고, 숲의 공간이 더 두드러지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숏 사이즈의 변경을 통해 공간의 정취를 느끼게 하며 한 편의 대화극이 끝났음을 알린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김도연)
김덕중 감독은 2019년 BIFF에 초청된 <에듀케이션>에서 장애인 엄마와 미성년자 아들 둘만 사는 집에 장애인활동보조인으로 파견된 20대 여성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담아냈었다. 다음엔 그가 어떤 캐릭터와 사건을 만들어낼까 궁금했는데, 완전히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담은 작품으로 또 한 번 놀라게 한다. 2021년 신작 <컨버세이션>에서는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제목 ‘컨버세이션(conversation)’이 뜻하는 바대로 ‘대화’만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며 인물의 상황과 심리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삶의 진실을 드러낸다.
세 여성이 아늑한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우리는 그들의 대화를 통해 셋 모두 프랑스 거주 경험이 있는 절친한 사이라는 것, 두 사람은 미혼이고 한 사람은 기혼유자녀여성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생각과 과거의 경험 등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금세 인물을 파악하면서, 대화란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무서운 것임을 느끼게 된다.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은 앞의 세 여성과 나중에 등장하는 세 남성인데, 이들의 대화 장면을 현재와 과거를 뒤섞어 배열한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큰 틀에서 줄거리는 그 중 남녀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는 것이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건 그들의 대화 자체다. 그리고 그 대화를 ‘원 씬 원 숏(one scene one shot)’으로 찍었다는 점이 <컨버세이션>의 가장 중요한 형식상 특징이다. 영화는 시퀀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시퀀스는 씬의 조합, 씬은 쇼트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처음과 마지막을 제외한 모든 씬을 롱테이크로 찍은 하나의 쇼트로만 구성하여, 영화 속 시간과 현실의 시간을 일치시킨다. 전작에서 보여준 높은 핍진성을, 신작에서는 이러한 형식을 통해서 더욱 효과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대화의 형태와 내용은 다양하지만, 참여자는 세 명 이상을 넘어가지 않는다. 대개 셋 이상이 되면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그 안에서 다시 둘 혹은 셋으로 쪼개지곤 하므로, 이러한 감독의 선택은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프레임에 등장하는 인물이 한 명일 때도 있는데, 그때도 그는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다. 그 수단은 전화가 되기도, 편지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모든 씬을 대화 장면으로만 만든 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심은 ‘말’로 전달되는 것이고, 사건은 이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감독은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하게 등장하는 영화 속 대화가 언제나 잘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친한 친구들끼리의 대화도 삐걱댈 때가 있으며, 썸을 타는 남녀 사이에선 엇갈리기도 하고, 낯선 이가 시도하는 대화는 거절당하며, 상담자와 내담자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린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모든 이와 소통할 수 없고, 때로는 진심이 가닿지 않기도 하며, 생각이 다른 이들과도 같은 공간에서 어떻게든 함께 머물러야 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것. <컨버세이션>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되는 삶의 진실이다.
각자의 이야기 (이한슬)
김덕중 감독의 신작 <컨버세이션>(2021)은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 한 장면을 한 컷에 담은 롱 테이크로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끊임없이 보여준다.
영화는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 생활을 한 40대의 세 여자 친구들이, 은영(조은지)의 집에서 커피와 다과를 즐기며 파리 여행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때 그 시절에 자신들이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유학 생활을 했는지, 그리고 돌아와서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를 토로하며 세 친구는 지난날을 회상한다.
그 모습은 일상 속에서 오랜 친구들을 분위기가 좋은 카페에서 만나, 예전 이야기를 신나게 회상하며 이야기하는 어느 날의 모습과 매우 비슷한 인상을 남긴다. 그래서인지 여러 사람들과의 대화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로 다가오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은영(조은지)과 승진(박종환)을 중심으로 그들의 친구들과 함께 소소하게 나눈 일상적인 대화로 꽉 채워져 있다. 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많은 대상과 대화를 하며 살아가게 된다. 극중 은영처럼 말이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 나와 어떤 관계의 사람인가에 따라 대화 주제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 영화는 은영과 친구들, 그리고 우연히 만난 택시기사, 연애 감정을 느끼고 있는 대상, 상담사로 만나게 된 내담자와의 대화를 쭉 나열하듯이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대화는 그 주제가 매우 폭 넓고 매우 응집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주지만, 사실 그 대화는 얼기설기 엮여져 있어 중간 중간 구멍이 있는 대화들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에게는 특별한 상황이나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일상 속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들을 인물들의 대화로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얼핏 아무 연관도 없는 대화들의 나열이라고 느낄 수 있는 장면들 속에서 누구나 한번쯤 고민할 수 있는 묵직한 주제를 문득 문득 던진다.
겨울에서 여름이 될 때까지, 혹은 그 보다 더 오랜 시간동안 지지부진한 연애 감정을 숨긴 채 애써 친구 관계로 남아 있는 은영과 승진의 대화가 인상 깊다. 사랑하고 자신이 잘 보이고 싶은 대상에게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과, 자신의 속내를 표현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들의 솔직한 대화는 일상에서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관계의 고민들을 담고 있다.
영화는 연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친구 관계에서도의 가치관의 차이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지방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고, 서울로 돌아오는 KTX 안에서 적어 내린 승진의 기쁘지 않은 손편지는 과연 전해졌을까. 가까이 지냈던 친구와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쓴 승진의 편지 내용을 들으며, 문득 지나쳤던 여러 관계의 사람들이 떠오른다.
길이가 매우 긴 장면을 온통 등장인물의 대화로 이루고 있는 이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긴 대화의 구멍 속 숨겨진 이야기를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하게 하는 재미가 있다.
그들의 시간은 어디쯤일까? (이미현)
대화를 통해 우리는 어떤 것을 알 수 있을까? 영화 <컨버세이션>은 제목 그대로 대화의 힘으로 이끌어가는 작품이다.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고 한자리에 머물러 등장인물을 지긋이 바라본다. 주인공의 시선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지적인 위치에 있지도 않다. 그저 관객의 눈높이에 두고 이들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담아낸다. 우리가 나누는 일상의 대화 또한 컷으로 나눠서 지지 않기에.
<컨버세이션>은 주인공 은영(조은지)과 승진(박종환)의 이야기가 각각 등장한 후 두 사람이 만나는 과정을 담은 영화이다. 다만 나열된 장면은 시간의 순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인물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편집 없이 원샷 롱테이크로 이뤄진다. 대화를 나누는 시간만큼은 현실과 동일하게 흘러가지만, 인물의 시간대는 바로 눈치챌 수 없다. 관객이 보고 있는 등장인물의 시간이 과거인지 그보다 더 앞선 과거인지 현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없다. 그럴 땐 가만히 인물의 대화를 들어보자.
그저 그들의 대화를 통해 조금씩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아파트 공원에서 승진과 필재(곽민규)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서로 반말을 하고 있고 승진은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있다. 둘은 형제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겠다. 대화를 듣고 알아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서로 반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장면으로 대명(곽진무)의 아파트가 등장한다. 필재와 승진이 어색한 듯 인사를 나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원에서 반말하고 있던 그들은 형제가 아니었고 대명의 소개로 알게 된 사이이다. 그렇게 시간은 그들이 처음 만나던 때로 돌아간다.
영화의 중후반 즈음, 카페에 혼자 앉아있던 승진은 카운터에서 음료를 받아나가는 여자에게 어색하게 말을 건네는 장면이 있다. 멋없는 꼬심에도 못 이기는 척 승진의 옆자리에 앉는 여자는 은영이다. 둘의 첫 만남일까 생각하는 찰나 “아, 우리 말 놓기로 했지”라는 대사가 들려온다. 처음이 아니다. 이 둘에게 어떤 첫 만남이 있었을까? 그들의 대화로 재미난 공상을 펼쳐본다.
영화가 끝난 뒤, 관객의 손에 각각의 슬라이딩 퍼즐이 쥐어진다. 영화 <컨버세이션>은 그들이 나눈 시간을 담은 네모난 프레임의 순서가 맞지 않는다고 억지로 뜯어내서 다시 붙이는 영화가 아니다. 퍼즐 속 남은 빈칸을 요리조리 움직이며 만나게 되는 새로운 퍼즐 그림을 발견하는 재미를 가진 영화다.
텅 빈 장면의 행간 (박미리내)
<컨버세이션>은 양성애자인 승진이 은영과 필재 두 사람 중 은영과 결혼한 이야기를 많은 영화적 표현은 버리고 롱테이크 대화로만 풀어낸 영화다. 은영이 결혼 후 승진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며 친구들에 말하고 난 뒤 과거로 돌아간 대화들은 지나간 시간 속 승진과 은영을 소환한다. 이 영화의 기묘한 특징은 모든 씬이 롱테이크며 쇼트로 나눈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씬이자 롱테이크의 대화가 끝나면 시간과 공간, 인물이 바뀐 다른 장면이 나오는데 한참동안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에 집중하다 보면 누구인지, 어떤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나는 대화인지 짐작할 수 있다. 최대한 절제된 영화적 표현을 가진 <컨버세이션>이기에 관객은 스스로 장면 사이 행간을 봐야 한다.
특히 롱테이크에서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스크린 바깥 우리가 있는 현실처럼 겹치는데 이상하게 <컨버세이션> 안에서는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나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무슨 말이라도 해 봐’, ‘네가 말을 해야 내가 알지’ 같은 인물 사이 매끄러운 대화 연결을 위해 쓰인 대사들은 정확한 대본 없이 살을 붙여 인물들에게 집중하려한 배우들의 열연을 짐작하게 한다. 이처럼 <컨버세이션> 안의 롱테이크는 리얼리즘의 장치임에도 동시에 현실이 아닌 영화임을 환기하는 묘한 구실을 한다.
또 현실감 있는 롱테이크를 위해 고정된 화면은 어쩔 수 없이 공간의 제약을 만드는데 같은 공간을 계속 맴도는 인물의 움직임, 고정된 화면에 익숙해질 찰나 인물을 슬쩍 따라가는 카메라, 화면 바깥에서 인물들이 들어오거나 나가는 움직임, 외화면 소리로 해결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이런 점들은 영화 속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마치 고정된 사물의 무생물 시점처럼 느껴져 관객에게 웃기고 재밌는 경험을 선사한다.
그동안 수많은 영화들 속 존재했던 영화적 표현이 그 안에서 허용된 현실이었기에 <컨버세이션>이 리얼리즘을 추구하기 위해 선택한 롱테이크만의 장면 연결은 어색하다. 분명 그 선택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위한 것이겠지만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의미는 리얼리티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영화적 허용으로 스크린 바깥 관객에게 전달되는 감정이입을 과감하게 무시해 리얼리즘을 추구한 표현은 오히려 리얼리즘을 표현주의적으로 되받아 쳐 그 의미를 상쇄시킨다. 이 아이러니가 <컨버세이션> 대화 즉 장면 간의 행간이다.
<컨버세이션> 은 결혼 후에도 필재와 만남을 이어가는 승진과 그런 승진에게서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은영, 주변의 인물들이 가지는 삶의 공허, 불만 등을 그린 단순한 이야기 흐름을 가진다. 그 이야기를 롱테이크의 연결과 시간의 역행으로 섞어 붙여 전체적으로 알 수 없는 뭔가를 보여주고자 했지만 결과적으로 와 닿지 못한 실험적 연결이 됐다.
인간극장의 영화화 (박지윤)
나는 인간극장 애청자다. 평범한 인물이 나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이어가지만 그런데도 재미있는,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지만 그렇기에 자연스럽고 재미있는. <컨버세이션>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인간극장을 영화화하면 이런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나는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피식, 피식 웃기 시작했고 저런 친구가 있으면 인생이 재미있겠다 생각했고,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아, 재밌다, 재밌어….
<컨버세이션>은 40대 여성 은영(조은지 역)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그는 파리에 2년 살다 왔고, 파리에서 같이 살았던 친구가 있고, 한국으로 돌아와 승진(박종환 역)을 만났고, 결혼했고, 애를 낳았다. 이러한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대로 이어지지 않고 조각조각 난 채로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그렇게 리드미컬한 내러티브를 완성한다.
<컨버세이션>의 모든 장면은 원 신 원 컷, 롱 숏 롱 테이크다. 이러한 구성은 다시 ‘인간극장의 영화화’를 떠올리게 한다. 원 신 원 컷으로 구성되었기에 하나의 신은 다른 카메라로 다시 비치는 법이 없다. 여러 번의 촬영으로 클로즈업과 롱 숏 같은 장면을 이어 붙이는 다른 영화와 다르게 이는 행동의 일회성을 직시하게 한다. 인간극장과 같은 다큐멘터리가 그렇듯이 한 번의 행동이 그대로 최종 결과물인 것이다. 물론 여러 번의 재촬영이 있기는 했겠지만, 극영화라는 형식을 고려하면 그 안에서 최고치의 휘발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음으로 롱 숏 롱 테이크를 들여다보자. 첫 신은 은영을 포함한 40대 여성의 대화로 시작되는데, 그들은 자신의 대사가 끝나도 화면에 그대로 남는다. 감독이 지시하지 않은 대사의 빈칸을 무언가로 채워야 하는 셈이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옆에 누운 아기를 돌보기도 하면서 각자의 행동을 한다. 그렇게 연기의 끝이 희미해진다.
남자 셋, 여자 셋의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살짝 아쉬움이 있다. 그렇지만 매력이 더 큰 작품이다. 조은지와 박종환 배우의 연기가 찰지고, 형식과 이야기가 찰떡이다. 그러니까 결과물은 뻔하다. 이건 맛깔난 영화다.
특이한 구성의 영화 (조영남)
영화는 줄거리를 통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냥 잡다한 일상의 대화를 통해 많은 것들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승진과 결혼한 은영을 중심으로 그들과 관계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함께 파리 유학을 했던 은영의 친구들, 승진과 묘한 관계인 필재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관계와 과거와 현재 상태를 보여준다.
작중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시점과 상황이, 과거와 현재의 엉킴이 드러난다. 그렇다고 관계에서 빚어진 내밀한 감정이나 일은 알지 못한다. 다만 대화에서 드러나는 아주 작은 단서나 뉘앙스로 유추만 할 뿐이다. 현재와 과거가 엉키고 흩어져 있어 퍼즐조각을 맞추듯 이야기를 완성시켜야 하는 건 관객이다.
은영이 택시 기사와 나누는 대화에서,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승진과 필재의 대화에서 관객은 관찰자 입장이 되어 그들을 바라보게 된다. 아무 관계도 없는 객관적 입장에서 듣고 있으면 대화라는 것이 쌍방향 소통으로 이루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대화를 하고 있지만 각자 자기얘기만 하고 있거나 뜻의 왜곡이나 불통으로 인한 소통의 부재를 엿볼 수 있다.
대화의 어긋남, 오류로 인해 이해 불가한 영역에 남게 된 은영과 승진. 그들은 처음부터 대화가 어긋났다. 그 어긋남은 관계의 어긋남으로 이어지고 결국 은영은 불행을 경험하게 된다. 승진 또한 그러지 않았을까...
대화는 소통을 기본으로 한다. 우리의 관계의 많은 부분이 대화로 이루어진다. 비록 어긋나더라도 할 말은 해야지만 나를 드러내고 상대방의 상태를 알게 된다. 대화로 상대방을 충분히 공감하거나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관계가 대화로 이루어짐에도 대화가 가지는 한계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은영의 친구 둘이 계단에서 담배를 피우며 나누는 대화가 주변 소음에 뭉개져도 상대방 말을 제대로 귀담아 듣지도 않으면서 듣는 척 해도 그렇다고 대화를 포기할 수는 없다.
말하는 사람이 충분히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거나 듣는 사람이 자기식대로 해석하여 뜻을 왜곡시켜버린다고 해도 포기할 수는 없다. 뉘앙스나 표정으로 인해 오해나 곡해가 생기기도 하니 완전한 대화란 건 어쩌면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은영과 승진이 티격태격하며 친구에서 부부로 이어졌지만 결국 그 간극을 메우지 못해 헤어짐을 암시하는 건 충분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속절없는 대화는 끝을 모르고 (정인범)
앙드레 바쟁의 말을 굳이 빌려오지 않더라도, 몽타주와 롱테이크가 봉합될 수 없는 대립 관계에 있다는 것은 정설이다(물론 영상 언어의 발전과 갖은 테크닉으로 이를 어느 정도 화해시킨 사례가 종종 보이긴 한다). 다시 말해, 몽타주와 롱테이크 태생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다른 각각의 존재다.
이런 거창한 말을 잠시 치워두고, <컨버세이션>을 들여다보면 신기한 지점이 발견된다. 첫째, 이 영화는 고작 열다섯 개의 롱테이크 쇼트로 구성되었다는 것. 둘째, 이야기가 구심점을 가지고 수렴하기보단, 끝없이 발산해 나가는 대화만으로 나열되어있다는 것.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난데없는 상황들을 정리해주는 중심인물인 은영(조은지)과 승진(박종환)이 있다는 것.
이 영화는 그 무엇 하나 뚜렷한 게 없다. 오히려 일상에서 나눌 법한 의미 없는 대화가 속절없이 이어지는 것에 진배없다. 우리의 반짝거리는 일상이나 특이점을 포착하는 구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도리어 다른 극에 비해 하등 비루해 보이는 지점들을 임의 선택하여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다시 본 서문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필연적으로 이별해야만 할 거 같은 두 개념이 이 영화에서 끊임없이 충돌한다. 즉, 열다섯 개의 롱테이크가 감독의 의도에 맞추어 몽타주로 제시될 때, 우리는 어떤 의미를 창출해낼 수 있는가. 일상의 흔적들을 지독하게 붙잡고 그 평범함을 설파하는 영화에 대해서 우리는 이 쇼트들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해야만 할까. 이 영화는 이 파악에 대한 거부를 드러내고 있다. 단적으로 이 영화가 어떤 의미를 설파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도리어 영화 내의 모든 정보나 대화들은 하나의 시공간 안에서 운동하다 멈추길 노력한다. 즉, 인과나 상관으로 묶여있기를 끊임없이 저항한다. 요컨대, 은영이나 승진의 만남 이후에 그들의 관계나 그 주변 인물들의 관계는 이전 쇼트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이전 쇼트나 혹은 이후 쇼트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쇼트는 하나의 쇼트로서, 혹은 하나의 대화로서 온전히 기능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전의 영화에서 쇼트가 생략되었을 때, 혹은 특정 이음새가 빠졌을 때 영화의 기능이나 서사의 탄력이 얼마나 훼손되는 지를 생각한다면, 이는 사뭇 파격적으로 다가온다.
<컨버세이션>은 계속해서 상영될 것이고, 그 안의 인물들은 속절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테다. 결국 이것은 어떤 의미의 창출이 아니라, 어떤 의미들의 탈락에 가깝다. 다시 말해, 롱테이크로 이루어진 열다섯 개의 쇼트 관계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도리어 단독으로 보아도 무방한, 하나의 무의미의 축제이다. 화려하고 긴장감 넘치는 스펙타클한 영화를 보는 것도, 서사적 트릭이나 비주얼 혹은 사운드에 압도되는 영화를 보는 것도, 물론 영화의 큰 재미 요소에 해당될 테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소소하고 덧없음을 나긋하게 얘기해주는 영화 역시 재미있는 영화이지 않을까.
대화를 생각해보기 (김동현)
영화 <컨버세이션>은 그 제목처럼 일상 속 인물들이 나누는 평범한 대화로 가득 찬 영화다. 프랑스 유학 경험이 있는 세 명의 40대 여성의 대화로 시작되는 영화는 은영(조은지)과 승진(박종환)이 서로 대화하거나, 은영 혹은 승진이 그들의 주변 지인들과 대화하는 일상적인 장면들을 비선형적으로 나열한다. 아니 조금 더 쉽게 풀어 말하자면, 영화는 그들의 인생 일부분을 가위로 뚝뚝 잘라 순서에 상관없이 이어 붙여놓은 것 같이 보인다. 극 중 인물들과 거리를 두고 놓여진 카메라는 롱테이크로 그들의 말과 행동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관객은 타인의 인생의 일부분을 아주 객관적인 위치에서 바라보게 된다. 인물들의 대화를 유심히 듣다 보면 그들의 배경과 성격은 물론, 서로 간의 관계성까지도 유추해 볼 수 있다. 발화의 기회는 모두에게 평등한 것은 아니기에, 어느 인물은 대화에서 주도권을 갖고 이야기를 끌고 가고, 주도권을 쥐지 못한 누군가는 자신이 하고싶은 말을 하지 못해 화를 내는 상황도 펼쳐진다.
영화 <컨버세이션>은 영화를 다 보고 난 관객이 신을 어느 위치에 어떻게 배열해 놓느냐에 따라, 이 영화를 각자의 다른 삶을 살아온 은영과 승진이 끝내 만나게 되어 가족을 이루게 되는 이야기로, 혹은 현재의 생활에 불만족 스러운 은영이 승진과 만나게 된 과거를 되짚어보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겠다. 이런 식으로 영화 속 잘린 조각들을 이어 붙여 하나의 이야기를 연상해 보는 것은 영화 <컨버세이션>이 제공하는 또 하나의 재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재미와는 별개로 그건 그렇게 중요해보이진 않는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순서를 앞 뒤로 맞춰가며 완결성 있는 이야기를 찾아 보는 것보다,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보며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 녹아있는 정보를 실시간으로 잡아내어 앞 뒤의 신들 간의 관계를 유추하는 과정, 그런 순간. 그것이 영화 <컨버세이션>의 핵심일 것이다.
한 가지 재미 있는 것은, 이렇게 관객이 지도를 펼쳐 들고 극 중 인물들이 내뱉은 말을 핀 포인트 삼아 길을 찾아 나서야 하는 영화에서 대화 속 말의 허점들까지 꺼내어 보여준다는 점이다. 상대와 대화를 하며 내뱉는 말들은 주관적일 수 밖에 없으며, 때로는 즉흥적이기도, 때로는 자기 변호적이기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생기는 그런 구멍 같은 것이 있다. 분명 서로 말은 하고 있으나 전혀 통하지 않는 상담자와 삼당 대상자의 대화 같은 장면들 말이다. 말은 말하는 자가 의도한 그 뜻을 제대로 전달 못할 경우가 있다. 말하는 자의 문제일 수도, 듣는 자의 문제일 수도, 아니 모두의 문제일 수도 있다. 말은, 아니 대화는 그런 불완전한 소통수단이다.
대화가 만들어내는 리듬 (오민석)
<컨버세이션>은 은영과 승진을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의 대화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제목에서부터 이 영화에 있어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추측할 수 있고 극 중에서 어떤 대화들이 오갈지 궁금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와 달리 대화의 내용이 영화의 중심인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극영화와 달리 <컨버세이션>에서 특정한 메시지나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포착해내기는 힘들다. 오히려 인상적인 것은 내용적인 측면보다는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일정한 리듬이다.
이 영화에는 심오한 서사나 사건이랄게 없다. 대신 인물들의 대화로만 영화의 리듬을 형성한다. 감독은 이를 위해 다양한 방식을 사용한다. 우선 극 중에는 대화의 여러 양상이 나타난다. 두 명이 하는 대화, 세 명이 하는 대화, 전화를 통한 대화, 편지를 통한 대화. 대화가 재밌게 흘러가기도 하는 반면 소통의 오류가 생기기도 하고, 어떤 때는 독백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막간에 화자 사이의 단절이나 침묵을 삽입함으로써 대화의 홍수 속에서 숨막히지 않게 완급조절을 적절히 잘 해낸다.
대화로만 구성되는 각 시퀀스들이 나열된 순서를 살펴보면 이는 시간 순서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순행적이고 비선형적인 구조다. 뒤섞인 구조이지만 관객은 시퀀스마다 나오는 인물들의 대화에 집중함으로써 나름대로 영화를 재구성할 수 있다. 대화를 통해 힌트를 얻기 위해서는 대화의 흐름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이 흐름만 잘 따라가면 대화에 사용되는 특정한 단어나 표현을 통해 대화자들에 대한 정보, 상태, 친밀도나 어색함의 정도 등을 파악해 각 시퀀스들을 인과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순행적 구조를 따르지 않는 것은 대화에 더욱 집중하게 만들고 리듬을 탈 수 있게끔 방향성을 설정해준다.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 대화 장면을 담는 방식도 생각해볼 만하다. 인물들이 대화할 때 카메라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정적으로 사용하며 이 장면을 롱테이크로 길게 담는다. 이 때 대부분의 시퀀스에서 고정된 카메라에는 화자와 청자가 모두 포착된다. 대화자들을 교차하며 보여주지 않고 그들을 한 프레임에 함께 들어오게 한다. 이를 통해 화자의 모습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말에 대한 청자의 대답, 몸짓, 표정과 같은 여러 반응을 함께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감독은 대화 상황 속에서 나오는 다양한 주변부 소리들을 함께 담는다. 이러한 점들은 대화를 죽은 것이 아니라 엄연히 영화의 리듬과 운동을 담당하는 생생한 유기체적인 것으로 만들어낸다.
<컨버세이션>은 깊은 의미를 가진 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인물들이 펼쳐나가는 여러 대화들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고 거기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사사로운 대화의 흐름과 영화의 리듬을 따라 가다보면 영화를 나름대로 재구축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컨버세이션>에서는 다른 매체가 아니라 오직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영화적 체험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두리뭉실한 행복 (심미성)
<컨버세이션>은 제목 그대로 아주 정교하고 세밀하게 벼려진 대화의 공방전을 만날 수 있는 영화다. 박종환, 조은지, 곽민규, 김소이, 곽진무 등 독립영화계 스타들이 대거 출동해 말맛을 돋우고, 평범한 우리를 닮은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는 어느 하나 공감 가지 않을 대목이 없을 정도로 일상적이다.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관객들의 공감 섞인 웃음소리로 객석은 훈훈했다. 영화의 명백한 주연이라고 볼법한 대화 속에는 엄마가 락앤락 통에 잔뜩 싸준 굴의 난감함, 파리 유학을 하면서 느꼈던 비참함, 남편을 가끔만 사랑하게 된 이야기 같은 것들이 담긴다. 거기다 은근슬쩍 추파를 던지는 남자와, 그런 남자의 모호한 태도에 실망하는 여자의 모습 등 사랑과 우정에 관한 미묘한 비언어적 발화까지 남김없이 끌어모아 극사실주의의 결을 맞추고 있다. 또, “너는 뭔가 생긴 게 아득바득한 느낌?”, “두리뭉실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부분이나 김수희의 노래 ‘애모’를 ‘김수애’의 노래로 오인하는 대목들마저 불완전한 매력을 갖춘 디테일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영화를 보며 가장 감응했던 부분은 주변의 소음을 부러 배제하지 않고 화면 속으로 과감히 끌어들이는 전략이었다. 김덕중 감독은 전작 <에듀케이션>에서 이러한 세팅을 시도한 바 있는데, 당시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은 ‘거의 들리지 않던’ 첫 시퀀스의 대사를 두고 그의 부실한 연출력을 힐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장면이 싫지 않았다. 아니 좋아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화각의 이동이 전무한 상태에서 온 영화의 빈곤한 리듬을 채워주는 희한한 ‘변칙’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사실상 '대사'란 플롯이 아닌 스토리를 운반할 뿐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컨버세이션>에서 소음과 대화가 적절히 섞이도록 하는 전략은 밸런스를 잘 갖춘 채로 관객에게 가 닿고 있다. 따라서 그의 지난 의중이 이번엔 나름의 명확한 전달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기뻤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영화의 구석구석에서 발생한 빈칸을 채워 매끄럽게 다듬어진 이 영화를 상찬하기는 다소 망설여졌다. 들리는 대화의 결은 생생했으나, 전반적인 꼴은 지나치게 반듯한 매무새로 느껴지는 까닭이었다.
<컨버세이션>은 하나의 고정된 장소에 화각을 잡아 촬영한 원 쇼트 원 신의 플랑 세캉스(plan-sequence)로 모든 시퀀스를 구성하고 있다. 이는 마찬가지로 전작 <에듀케이션>에서 이미 목격한 전술이기도 하다. 이 경우 인물들의 움직임의 반경은 경직되기 쉽고, 연기나 대사에 과한 포커싱을 맞출 우려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컨버세이션>은 외부의 소리를 끌어 오거나 인물이 자유롭게 화면을 이탈하는 방식으로 외화면을 폭넓게 사용하는 흥미로운 구성을 취하고 있다. 특히 승진(박종환)과 필재(곽민규)가 등장한 몇 개의 신에서 인물은 시야에서 자유롭게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전반적으로 <컨버세이션>은 전작에 비해 감독의 장기와 한계가 뚜렷해지는 과정에 있는 영화로 다가왔다. <에듀케이션>과 <컨버세이션>이라는 말 끝을 맞춘 제목까지 어딘가 강박적인 성향의 요약으로 감지되기도 하며, 어느 정도는 영화를 귀여운 소품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시퀀스를 나열하는 구조 역시 지나치게 단순하게 느껴져서, 과연 다음 영화에서 이 강박을 초월하는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컨버세이션>은 올해 내가 가장 즐겁게 관람한 영화면서, 동시에 해석의 욕망을 닫히게 한 영화였다.
대화 사이의 공백이 가지는 힘 (이지원)
<컨버세이션>은 김덕중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나간다. 은영(조은지 역)과 승진(박종환 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며, 주제와 감정의 온도가 다른 각각의 대화 장면이 비선형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화의 조각은 시간 순서나 인과 관계와 무관하게 분절되고 엇걸려 있어 다소 붕 떠 있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대화 사이의 공백은 인물의 미묘한 표정과 말투, 몸짓, 그들을 감싸는 공기에 주목하게 하는 동시에, 내러티브를 상상하고 만들어내는 인간의 본능을 자극한다.
영화는 은영이 왜 한국에 돌아왔는지, 승진과 필재가 어떤 계기로 연인 사이가 되었는지, 은영과 승진이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는지 구태여 설명하지 않는다. <컨버세이션>에서 대화는 인물을 설명하거나 사건을 전개하는 역할이 아닌, 그 자체로 탐구의 대상이 된다. 감독은 카메라를 고정해 놓고 관객이 직접 시선을 이동하며 대화의 찰나를 읽어나가도록 한다.
가령, 지인을 통해 처음 만난 승진과 필재는 형과 아우처럼 술을 기울이며 대화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두 남자는 나란히 앉아 버스킹을 보며 대화한다. 대화 사이의 공백은 말 이상의 것을 감각하게 만든다. 약간의 머뭇거림과 부드러운 말투, 그윽한 눈빛과 서로를 원하는 몸짓은 그들의 달라진 관계를 암시한다. 더 나아가 이따금 엇갈리는 감정선에서 그들의 관계가 삐걱거릴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은영이 내담자와 상담할 때의 장면도 인상 깊다. 안정적이지만 변화하고 싶은 자,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정착하고 싶은 자 사이의 대화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존재한다. 답답함을 호소하는 말투, 서로를 향한 멋쩍은 웃음과 약간의 침묵이 그 간극을 더욱 넓힌다.
영화를 이루는 대화의 조각은 이리저리 조합해도 잘 맞춰지지 않는다. 빈 공간이 많을뿐더러 그 순서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분절된 장면을 보여주며 대화 그 자체에 주목하라고 하지만, 오히려 그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 관객은 각자의 내러티브를 작동시킨다. 어스름한 숲에서 은영과 승진이 응축된 감정을 폭발시킨 뒤, 그들은 어떤 새로운 감정으로 대화를 나누었을까.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현재의 그들은 또 어떤 온도와 주제로 대화를 나눌까. 대화 사이의 빈 공간에 대한 상상이 발동할 때 우리는 또 다른 컨버세이션을 구상하게 된다. 즉, 관객은 대화의 관찰자인 동시에 대화 사이의 공백을 구성하는 주체가 된다.
대화의 영화 - 영화의 대화 (함윤정)
<컨버세이션>은 영화에서 가능한 거의 모든 대화(Conversation) 장면을 보여준다. 특정한 위치에서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의 모습을 고정된 카메라로 포착하기도 하고, 움직이며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을 따라 카메라가 방향을 이동하기도 한다. 때로는 프레임 안과 밖의 두 인물이 나누는 대화가, 때로는 프레임 바깥의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가 등장한다. 한 인물은 제 자리를 지키지만 또 다른 인물은 프레임 안을 휘젓듯 이리저리 움직인다. 어떤 장면에서는 누군가에게 편지로 건네는 말이, 또 다른 장면에서는 전화기 너머 오가는 말들이 들려온다. 영화의 시작을 떠올려 보자. 대화의 영화답게 사각의 프레임을 인식하기도 전의 암전 상태에서 인물들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온다. 모든 장면 속 각양각색의 말들은 결코 매끄럽지만은 않다. 하지만 인물과 인물 사이를 비껴가는 말들은 오히려 실제 대화의 매력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누적되는 대화들을 통해 주요 인물인 은영과 승진의 이야기를 지도 그리듯 연결시키는 경험 역시 이 영화를 관람하는 큰 재미 중 하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이 영화의 신비로움을 설명할 수는 없다. 모든 장면이 '대화'라는 소재로 묶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컨버세이션>은 연결될 듯 연결되지 못해 물음표로 남는 부분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위에서 언급했듯 각 장면의 배열이 선형적이지 않기에 가능한, '작은 이야기들을 통해 큰 이야기의 지도를 그리는 행위'가 흥미롭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 덕에 발생하는 영화적 효과는 비선형적으로 흩어져 있는 것들을 하나의 선 위로 모으는 행위에서 느낄 수 있는 쾌감을 넘어선 데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우선 영화의 시간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컨버세이션>에는 현재가 없다. 정확히 말해 '이 장면이 현재고 저 장면은 과거다'라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이 부재하다. 물론 대화의 맥락을 짚어 보며 '장면 B가 장면 A보다 먼저고 장면 C는 장면 B 이후다'라고 짐작 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장면을 그런 식으로 배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특히 집에 돌아온 필재가 주차 구역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부분은 매우 잔잔한 분위기의 장면이지만 그와 동시에 시간적으로 가장 돌출적인 장면이다. 해당 장면의 타임 라인은 어떤 장면의 앞 또는 뒤에 붙어야 마땅할지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붕 떠 있다. 필재는 승진이 전하는 '슬픈 편지'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일까? 혹시 이 날은 두 사람이 만나기 이전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의문이 <컨버세이션>이 어떤 영화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이다.
한편, <컨버세이션>의 서사를 대화만으로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손쉬운 일은 '롱 테이크'만으로 영화의 형식을 정의하는 것이다. 일상적인 대화를 현실의 시간처럼 긴 호흡으로 담아낸 장면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에 천착하다 보면 영화의 또 다른 중요한 돌출부를 놓치기 십상이다. 영화 속 대부분의 장면은 롱 테이크의 원 씬 원 숏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장면에 해당되는 일종의 규칙은 아니다. 다시 한 번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파리에서의 기억을 공유하는 세 여자의 대화는 같은 날, 같은 공간, 같은 시간대에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 장면에는 카메라의 위치가 바뀐 순간이 분명히 존재한다. 정확히 말해 <컨버세이션>의 첫 장면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두 숏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화 장면 중 숏의 분절은 일반적인 극영화에서 흔한 일이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각 장면 간의 일관성을 깨뜨리는 큰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촬영 도중 카메라의 위치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또는 편집 도중 두 숏을 붙여 놓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다만 첫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분절과 대비되는, 마지막 장면에서의 어떤 연결을 떠올리며 이 영화에 대해 말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마지막 장면, 등산 중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는 은영과 승진이 보인다. 몇 번쯤 만났다 헤어진 걸까. 알 수 없지만 말로 서로를 찌르며 주고받는 그들의 대화만은 여전하다. 너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다 안다며 자신하는 은영에게 승진은 대뜸 사랑을 고백한다. 진실이라 자신하기에도, 거짓이라 비난하기에도 내키지 않는 복잡한 상황. 아무 말 없이 벌떡 일어난 은영은 홀로 자리를 뜬다. 승진은 그런 은영을 뒤쫓고 카메라도 그들을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카메라는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멀찍이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본다. 결국 은영은 너를 정말 모르겠다며 진심을 토로하고 승진은 그런 은영의 신발 끈을 묶어 준다. 카메라가 인물들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 시점부터 어느덧 멈춰 그들과의 거리를 유지하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느꼈던 놀라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별 것도 아닌, 그다지 매끄럽지도 않은 카메라의 움직임이 어떻게 그리도 신비롭게 보일 수 있을까.
<컨버세이션>가 진정한 대화의 영화이자 영화의 대화인 이유는 카메라의 결심만이 영화의 언어이며 숏과 숏, 장면과 장면 사이의 크고 작은 분절은 곧 영화의 화법임을 온몸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묵묵히 그리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말과 대화를 포착하던 카메라가 비로소 인물의 몸짓을 따라 뛰어갈 때, 프레임은 더 이상 평면이 아니라 깊이를 가진 무언가로 변모한다. 현실을 옮겨 놓은 이야기를 넘어서 영화가 스스로 현실을 구성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주는 마지막 장면이 영화가 건네는 대화의 시작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수많은 대사로 가득한 영화에서 깔끔히 다듬어지지 않은 음향이 단점이 되지 않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전작 <에듀케이션>(2019)에 이어 또 한 번 카메라에 대한 굳은 믿음을 보여준 김덕중 감독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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